일본군과 싸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은 왜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지 않을까요?
똑같은 독립운동을 했음에도 양반유생들(1895)은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고,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1894)은 왜 서훈하지 않을까요? 왜 서훈에서 차별하고 있을까요?
국가유산청(전 문화재청)의 2023년 유네스코(UNESCO) 인용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등재 신청서’에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의 역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3·1운동이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부터 비롯되었다.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대표자였던 손병희를 비롯한 9명은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이며, 그 후예들이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중략) 동학농민군이 제기하였던 인권, 신분제 철폐 등은 오늘날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 계승되었다. 이를 통해 동학농민혁명-3·1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으로 이어져 민주공화제를 지향한 한국 민주주의가 동학농민혁명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와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한 9명(손병희, 권병덕,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이종훈, 임예환, 홍기조, 홍병기). 3·1운동 참여자는 서훈 받았으나, 항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현재도 서훈 받지 못하고 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보훈을 맡고 있는 국가보훈부는 1962년에 정한 ‘독립운동의 시작은 을미의병이다’라는 독립유공 서훈 내규를 가지고, 을미의병(1895)과 같은 시기에 독립운동을 전개한 2차 동학농민혁명(1894∼1895) 참여자들에 대해서는 독립유공자 서훈에서 배제하고 있습니다.
63년이 지난 현재도 바꾸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보훈부는 을미의병(1895) 서훈이 지극히 합당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국가보훈부는 1962년부터 2022년까지 을미의병(1895) 참여자 145명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였습니다. 잘한 일이었습니다.
2024년 3월 현재 18,018명 독립유공 서훈자 가운데 의병 참여자 2,722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습니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게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아야 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1990년부터 ‘독립운동의 시작이 종래의 을미의병에서 갑오의병(1894)과 2차 동학농민혁명(1894)으로 독립운동의 기점이 바뀌었습니다.
(※근거 자료: 김상기 교수, 「갑오·을미 의병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90, 8, 16쪽, 161쪽, 165쪽.; 조동걸, <의병들의 항쟁>, 민족문화협회, 1980, 50쪽.; 장석흥 교수, 「제2장 한국 독립운동의 시기별 특성」,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울아카데미, 1998, 57쪽.; 한시준, 「총설: 한국 독립운동사의 이해」, <한국독립운동사 강의>, 한국근현대사학회 엮음, 한울아카데미, 1998, 17쪽.)
2.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를 반영하여 2024년 발행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1905년의 을사의병과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1894)를 모두 항일구국투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을미의병(1895)과 을사의병(1905)은 독립유공자 서훈하고 있습니다. 전봉준 등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 참여자는 단 한명도 서훈하지 않고 있습니다. 2011년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동학 2차 봉기와 을사의병 서술도 똑같습니다.
3.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를 수용하여 「동학농민명예회복법」(2004) 제2조 1항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한 정의를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참여자”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역사학계는 국권수호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을 항일 독립운동으로 봅니다.
4. 국가 예산 소요도 매우 적습니다. 유족이 있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481명(2024년 9월 20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현황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자료 제공)에 불과합니다.
을미의병 시기 일본군과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이 236명이었고, 관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이 60명이었습니다. 전사자가 총 296명이었습니다. 전사자가 대략 3백여 명이었습니다.(김상기, 「한말 일제의 침략과 의병 학살」, <역사와 담론>제52집, 호서사학회, 2009, 4, 93쪽.; 김상기, 「전기의병의 일본군에 대한 항전」, <한국근현대사연구>20, 한국근현대사학회, 2002, 50쪽.) 을미의병 참여자는 현재 145명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2차 동학농민혁명은 참여자와 전사자의 규모에서 을미의병을 능가하였습니다. 나카츠카 아키라 교수는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모조리 살육했는데, 희생된 농민군 사망자가 3만 명, 부상당한 뒤 사망한 자를 포함하면 5만 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나카츠카 아키라, <현대 일본의 역사인식>, 모시는사람들, 2014, 235쪽.)
이노우에 가쓰오 교수는 동학농민군 전사자가 3만 명에서 5만 명에 달하였다고 기술했습니다.(이노우에 가쓰오, 「일본군 최초의 제노사이드 작전」,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모시는사람들, 2014, 113쪽.) 전사자를 비교할 경우 을미의병 전사자 보다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전사자가 1백배 이상으로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봉준 등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는 국가보훈부로부터 현재까지 단 한명도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1940년 9월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순국선열의 범위에 “을미사변 이후 을미의병 순국자”를 포함했습니다. 잘한 일이었습니다. 국가보훈부는 1962년에 정한 ‘독립운동의 시작은 을미의병이다’라는 독립유공 서훈 내규를 가지고, 지금까지 을미의병 참여자를 서훈했습니다. 잘한 일이었습니다. 다만 1940년이나 1962년에는 모두 동학농민혁명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가 서훈 대상에서 빠진 것이었습니다.
2023년 5월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동학농민혁명에서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고, 동학농민혁명을 ‘독립운동’의 역사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국가보훈부)는 독립운동에 참여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를 단 한명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지 않고 있습니다.
촛불혁명과 2024 빛의 혁명을 이끈 대한민국 국민여러분께서는 항일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독립유공자 미서훈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계신지요?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없는 것인지요?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독립을 지키고자 순국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명예를 제대로 회복하지 않고서, 앞으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와 독립이 훼손될 때 누구에게 대한민국 공화국을 지키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025.2.23. 박용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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